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과거사 청산 문제 (문단 편집) == [[나치 독일]]에 대한 태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gerhard-richter.com/9127.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547.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569.jpg|width=100%]]}}} || || '''{{{#fff 《루디 삼촌》[br]Onkel Rudi, 1965}}}''' || '''{{{#fff 《마리안네 이모》[br]Tante Marianne, 1965}}}''' || '''{{{#fff 《하이데 씨》[br]Herr Heyde, 1965}}}''' || |||||| 위 세 그림은 독일 현대미술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가 1965년에 발표한 가족초상화 연작들이다.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된 1960년대 즈음 [[현대미술]]계에서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가의 책무'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인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예술 작품들을 이용해 폭로하였는데, 리히터 또한 이 물결에 참가했다. 리히터의 가족초상화 연작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가족사를 과거 비극적 시대의 역사와 연결짓는다. 우선 가장 좌측의 작품은 1965년작 《[[https://gerhard-richter.com/en/art/paintings/photo-paintings/death-9/uncle-rudi-5595/?pg=6|루디 삼촌(Onkel Rudi)]]》이다. 친족어로 구성된 제목과 사진 속 모델의 순박하게 웃는 얼굴은 가까운 가족 중 누군가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어딘가 친밀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색감과 [[나치 독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군복/독일군|국방군 제복]]은 이와 상반된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번진 듯한 질감은 이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들며, 단순한 배경도 장소의 구체성을 약화시킨다. 제목 '루디 삼촌' 역시 그렇다. 1차적으로는 이 작품의 모델이자 실제 작가의 외삼촌이었으며 2차 대전 당시 국방군에 복무했던 루돌프 쇤펠더(Rudolf Schönfelder)를 지칭하지만,[* 루돌프 쇤펠더는 1944년 7월 31일 [[노르망디]]에서 전사했다.] '루디'는 한국의 '철수'처럼 많은 [[독일인]]들이 쓰는 애칭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인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디에나 있을 법한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 하지만 전쟁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다시 말해 '루디 삼촌'은 당대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나치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으나 동시에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이기도 했던 불특정 다수, 즉 '''[[악의 평범성]]'''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현재는 [[체코]] 리디체[* 1942년 친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나치 독일이 보복 학살을 벌였던 마을이다.]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독일 - 체코 양국 화해의 대표적인 증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작품 《[[https://gerhard-richter.com/en/art/paintings/photo-paintings/death-9/aunt-marianne-5597|마리안네 이모(Tante Marianne)]]》는 작가의 이모인 마리안네 쇤펠더(Marianne Schönfelder)의 사진을 가지고 만들었다.[* 사진 속 여성이다. 앞의 아기는 어린 시절의 작가 본인.] 독일군 군인인 동생 루돌프와는 반대로 마리안네는 나치즘의 피해자였는데, 1945년 2월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T4 작전]]의 두 번째 페이즈인 브란트 작전(Aktion Brandt)의[* 친위대 의사 [[카를 브란트]]에게서 따온 작전명이다.]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마리안네를 죽인 인물은 드레스덴 지역에서 브란트 작전을 감독하던 친위대 의사 하인리히 오이핑어(Heinrich Eufinger)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리히터의 [[장인]]이기도 했다. 리히터는 결혼하고 나서야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루디 삼촌이 당대의 독일 군인들을 상징한다면, 마리안네는 나치 정부의 희생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안네는 현재 독일에서 [[한스, 죠피 숄 남매|조피 숄]], 그리고 [[안네 프랑크]]와 함께 나치 정권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작품이자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의 사진을 이용한 《[[https://gerhard-richter.com/en/art/paintings/photo-paintings/death-9/mr-heyde-5620/?pg=8|하이데 씨(Herr Heyde)]]》는 이 복잡한 가족사를 더 심화시켜 보여 준다.[* 그림 아래에는 "1959년 11월, 법원에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 im November 1959, als er sich den Behörden stellte.)"라고 적혀 있다.] 의사였던 하이데는 리히터의 장인인 하인리히 오이핑어의 [[친위대(나치 독일)|친위대]] 시절 동료였다. 그는 친위대 의무부대장으로써 [[T4 작전]] 수립에 참여하고 각종 [[홀로코스트|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서도 근무했다. 그 역시 1945년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네의 죽음에 관여되어 있다. 베르너 하이데는 전후에 프리츠 사바데(Fritz Sawade)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그가 친위대 의사 '베르너 하이데'라는 사실은 전후 독일 의학계에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는 한동안 일상을 영위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독일 사회의 과거 청산 분위기가 무르익자 결국 1959년에 재판장에 자진출두했다. 그리고 1964년 본격적인 재판이 열리기 전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리히터의 작품 '하이데 씨'는 베르너 하이데가 법원에 출두하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원본으로 한다. 당연하게도, 하이데뿐만 아니라 나치 전범들 모두를 상징한다.[* 김승호. (2020).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가족초상화시리즈>(1965)를 중심으로 -. 석당논총, 76, 5-36.] 리히터 일가의 이 복잡하고 기구한 과거사는 그의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초상화 연작에서 볼 수 있는 흐릿한 실루엣은 당대 다른 많은 독일인들의 가정과 인간관계에도 루디 삼촌과 마리안네 이모, 그리고 하이데 씨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위르겐 슈라이버의 미술사 서적인 《한 가족의 드라마(Ein Maler aus Deutschland)》,[* 원제는 '독일의 한 작가'. 국내에는 도서출판 한울을 통해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작가 미상|작가 미상(Werk ohne Autor)]]》이[* 2018년작. 국내에는 2020년에 개봉했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동독 독재정권의 감시를 그린 영화 [[타인의 삶]]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리히터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 || [youtube(JMUFF6CvRmw)] || || '''"20년 전: 논쟁적인 국방군 전시회"'''[br]지난 1997년, '국방군 전시회(Wehrmachtsausstellung)'가 촉발한 독일 사회의 갈등을 보여주는 [[슈피겔]] 방송. 1995년에 함부르크사회조사연구소가 주최한 국방군 전시회는 [[독일 국방군|나치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를 조명하고, 그들 또한 히틀러의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에 적극 기여했음을 보여 주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독일인들은 국방군은 전쟁 범죄나 홀로코스트와 무관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전시회는 그러한 시각을 뒤바꾼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믿는 많은 수의 참전용사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국방군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분개하였으며, 거리로 나와 해당 전시회에 대한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그러자 [[안티파]] 또한 맞불 집회를 놓으며 이에 맞섰다. || [[http://flager8.egloos.com/v/2888538|왜 독일은 네오 나치를 뿌리 뽑지 못하는가?(슈피겔 기사 번역/2012)]], [[https://www.francetvinfo.fr/monde/europe/allemagne/allemagne-visite-a-jamel-le-village-des-neonazis_3653513.html|독일, 네오 나치 마을 야멜에 가보았다(프랑스2/2019)]][* 슈피겔의 기사로부터 7년이 지났음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와 하켄크로이츠에 대한 명확한 언급 없이는 경찰이 개입할 수 없다"라는 기사의 마지막 부분대로 현지 경찰은 이 문제를 방치한다.] 양차 대전으로 인해 주변국들에 많은 상처를 안겼음에도 과거에 대한 반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변국의 신뢰를 회복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등 교훈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서 대외적인 이미지가 상당히 좋다.[* 독일 입장에서도 EU를 바탕으로 온 유럽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현 상황이 영토나 이념 문제로 얼굴 붉히며 스스로의 외교적 입지를 깎아먹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지이다.] 실제로 그런 이미지와 행보를 고수하면서 강대국 지위를 회복했으며 유럽 내에서 강한 발언권을 유지한다. 그러나 독일의 과거사 반성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세계적인 [[강대국]]들과 [[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인 유대계의 모국 [[이스라엘]], 그리고 [[폴란드]]와 [[체코]], [[네덜란드]] 등을 비롯한 유럽 이웃나라들에게 외교적으로 밉보이지 않기 위해 행하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사실 패전 직후에는 [[서독]] 내에서 구 나치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적었다. [[1950년대|1950]]~[[1970년대]]에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해서 역으로 나치를 비판하다가 주변인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국방군". 볼프람 베테 지음.] 대표적인 예가 전후 6년 만에 등장한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사회주의 국가당]](SRP, Sozialistische Reichspartei)인데, 이 정당은 [[서독]]에서 [[친위대]]와 [[독일 국방군|독일군]] 출신들이 모여 합법적으로 [[나치즘]]을 계승할 목적으로 만든 당이었고 나치의 정강 정책이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북부 독일 일부에서는 25%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하여 나치 깃발이 다시 휘날리는 상황도 벌어졌다. 결국 [[독일 연방헌법수호청|헌법수호청]]은 1956년, 이 정당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후속 내지는 대체 정당 금지도 선고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1113193330|#]] 현재 독일에서는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우호 발언 뿐 아니라 나치 휘장, [[하켄크로이츠]]를 공중(公衆)에 내비치는 것조차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나치식 경례|팔만 잘못 올려도]] 당장 잡아간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 역시 위법이다. 그래서 [[독일어]] [[위키백과]][[https://de.wikipedia.org/|#]]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일부 나치 관련 문서는 편집제한 문서로 묶여 있으며, 토론란에도 [[키보드]]를 잘못 놀리면 [[감방]]에 갈 수도 있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히틀러와 [[나치즘]] 경험이 치욕스럽고 끔찍했는지 정보기관인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연방헌법수호청(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이 정치인, 공인들을 상대로 사상을 검증하여 조금이라도 [[나치즘]], [[파시즘]]스러운 발언을 했다간 공직 인생이 끝장난다. 이는 제2의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기 위함이다. 이는 외국인에게도 예외는 없어서 나치 등을 소재로 삼아 독일을 비하하면 독일 법에 저촉된다.[* 한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도 독일 여행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경고한다. 아예 이 사항에 대해서는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했듯 [[하일 히틀러|팔만 잘못 올려도]] 바로 잡아간다. 그래서 독일의 축구 응원이나 콘서트 응원 영상을 보면 관객들이 절대로 한 팔만 앞으로 뻗어서 응원하지 않는다. 두 손을 들거나, 팔을 위로 쭉 드는 등으로 응원한다.] 이러다보니 몇몇 독일인들은 "독일이 애국심을 가지면 좋게 끝난 적이 없다"며 국가의 상징들을 혐오한다. 이건 독일이 딱히 개념이 충만하다기보다는 전 국민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것에 가깝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의 제주도 편에서 독일 친구들에게 멕시코 친구들이 국기를 가져오지 않았냐고 묻자, 독일 친구 다니엘이 ‘독일이 국기를 들고 오는 건 그렇게 좋지 않지’라고 말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나치나 히틀러에 대해서 언급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도 않고, 학교에서도 올바른 역사와 나치와 히틀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교육한다. 독일 내 곳곳에 박물관을 만들어서 어린이들이나 관광객들에게 과거의 조상이 대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니 절대 이렇게 되면 안 되고 후세에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탈나치화|교육을 철저히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완전한 나치 청산이 아니라서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서독 법무부 간부 77% 나치당원 출신이라는 자료가 있다. 독일 법조계 일부 변호사들은 서독 전후 판사들은 대부분 나치즘을 믿는 나치 그 자체였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1960년대 서독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실행한 중간급 장교, 하급 장교들이 많이 체포되어 재판에 섰지만 적은 형량만 선고 받고 그나마도 가석방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 직접 [[치클론 B]]를 주입한 [[슈츠슈타펠|SS]] 장교 한스 스타크(Hans Stark)[*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으며 유대인 학살에 직접 가스를 주입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반성치 못하고 유대인 여성들을 죽인 걸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던 인물이다. 3년만에 석방되어 천수를 누리다 1991년 3월 29일 다름슈타트에서 사망했다.]같은 범죄자가 겨우 3년 복역하고 석방되었을 정도로 당시 서독 판사들은 지나치게 홀로코스트 전범들을 봐주었고 그 결과 나치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한편 1949년 서독이 사형제를 폐지한 이유도 인권 보호 국가로의 지향보다는 수많은 나치 전범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실제 서독은 사형제 폐지를 명분삼아 1950년대까지 미국, 영국이 자국에서 전범들을 처형한 것에 항의했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나치당 출신 판사들이 은퇴할 나이가 되고 나치의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세대가 판사가 된 이후부터 홀로코스트 등 전쟁범죄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나치의 전쟁 수행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중형을 선고하는 현재와 같은 재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1947년부터 현재까지 독일 법원에서 홀로코스트에 관여했던 나치 전범 중 책임자급 124명만 종신형을 선고 받고 나머지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독일인이 수십만 명이고 간접적으로 보자면 최소 백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관여되었기 때문에 독일 정부와 독일 국민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들추기보다는 역사 속으로 묻어 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우는 어머니와 아이를 뒤에서 총으로 쏘는 사진이 찍힌 나치 병사, 구덩이를 파놓고 무릎 꿇린 포로의 머리에 총을 쏘는 사진이 찍힌 나치 병사 등처럼 실질적으로 각종 만행을 저지른 수십만의 독일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손자, 손녀들에게 둘러쌓여 천수를 누리며 죽어가는게 바로 독일 과거사 청산의 현실이다. 다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게, 나치 독일이 하나의 정권이었고 그 아래에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종사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종전 후, 바로 냉전 체제로 전환된 세계 정세에서 나치 독일 인력 중, [[만슈타인|유능한 군인]]이라든가, [[폰 브라운|천재 과학자들]]은 직접적인 피해자들인 연합국에서조차 대충 처벌하거나 처벌을 아예 안 하고 눈 감고 다시 써먹었다. 자국민이 따로 있는 적성국도 이럴진데, 온 나라가 10년 이상 나치즘 치하에 있었던 나라는 더더욱 나치를 빼면 안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사실 연합국 본인들도 나치 전범들을 스카웃한 이력이 있으니 강하게 따지지는 못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아우슈비츠 회계사로 있었던 90살이 넘은 노인도 기소하여 재판을 받게 할 만큼 독일 법조계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가스 주입한 SS 장교는 봐주더니 이제 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회계사 노인 기소해봤자 무슨 소용이냐'라는 비판도 상당하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관련자들이 사망하거나 사망할 나이가 되어 실질적으로 나치 독일 과거사 청산의 마지막 재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상징적인 의미로 이제와서 90살 넘은 노인을 재판정에 세우는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재판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다만 이러한 경직된 분위기가 오히려 당시 상황을 객관적이고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여지까지 없애버렸다는 내외적인 비판도 있다. 물론 이것도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닌 게, 계속해서 나치에 희생당한 성소수자 등에 대한 메모리얼을 만들고 [[https://youtu.be/L90ehLuSrKI|히틀러를 희화화한 소설이 베스트셀러화]]되는 등 나름 회자되고 있다. 어쨌든 독일의 원죄의 상징이라서 외국인들과 섞인 환경에서 말이 나오는 건 불편해하는데 본인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치에 대해 꺼내는 것은 현대 독일에 대해 비난하는 의도로 꺼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독일에서 사람들에게 매장당하기 싫으면 말실수를 조심해야 한다. 독일은 통일 당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는데 이는 [[소련]]과 [[폴란드]]가 독일 통일을 승인하는 전제조건으로 영토 포기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주변 국가들이 독일 통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기도 하지만 과거 영토를 영구 포기하는 손실을 감수하면서 통일을 이루려 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또한 전후 45년이 지난 시점이라 독일인들 사이에서 '그 땅으로 인해서 수만 명이 죽었고 그리고 이미 뭐 다른 나라 영토 아님?' 하고 그냥 포기 자체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참고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원인도 [[단치히]]를 독일에게 넘기라는 구실이었으니 폴란드를 비롯한 주변국들도 현 폴란드 영토 반환 자체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한편 메르켈 총리는 [[실향민|구 독일령 내에 거주했던 독일인들이 추방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우경화 사상의 발로가 아니며 그저 추방되는 과정에서 독일인들이 겪은 고초를 지적한 것 뿐이다.[* 추축국의 피해를 입은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피해자 행세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독일 정부의 수장이 자국민이 겪은 피해를 정당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일이다. 독일은 과거 나치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하기 때문에 자국민을 위한 이러한 발언마저 피해자 행세라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조금 더 실리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패권 다툼을 땅따먹기로 하던 때는 제국주의 시대였고 현재 세계의 패권은 조금 더 복잡한 외교전/경제전으로 진행된다. 독일은 이웃나라 프랑스와의 비전을 공유하고 비유럽국가들의 고성장으로 인한 기타 다른 유럽국가들의 위기감과 본인들의 경제적인 부국으로서의 입지를 잘 살려서 전 유럽적인 블록을 만들고 그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면서 이미 전유럽을 독일의 영향권 아래 놓는다는 오랜 숙원에 어느 정도 근접한 상황이다. 까놓고 제국주의 시절 독일은, 후발국 패권 도전자의 위치에서 전 국토를 들고 도박을 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현대 독일은 이미 EU라는 거대한 블록 안에 패권국에 가까운 위치이기 때문에 이런 무리수적인 도박을 둘 필요도 없을뿐더러 본질적으로 국제 판도를 뒤흔드는 행위인 전쟁이 일어나면 오히려 현 질서에 균열이 일어날 수 있기에 잃을 것이 더 많다. 게다가 1차 대전 독일[* 이들도 화학무기를 선방쳤고 벨기에의 강간 등 전쟁범죄를 벌였지만 협상국 역시 화학무기를 썼기에 어느 정도 참작된다.]과는 또 다르게 2차 대전 나치 독일은 유례없이 심한 짓을 저지른 것도 맞다.[* 간혹 가다가 서양인들이 당해서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아예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의 일이 흔한 것도 절대 아니다. 사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부수적으로 학살을 진행한다'는 관념은 역사적으로 항상 있었지만 '학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인 공장을 돌린다'는 관념은 그 시대 기준으로 놓고 봐도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발상이었다.] 유래없을 정도로 민간인까지 미친듯이 죽여나갔고 벨라루스 초토화 등 휩쓸고 지나간 곳은 잿더미가 되었기에[* 2차 대전의 전체 사망자 가운데 2/3 정도가 유럽 방면에서 나왔고 이는 모조리 나치 독일로부터 시작된 참사였다.] 이것은 전유럽적 트라우마로 남아 현대 독일의 발언력과 영향력 확대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다. 독일 입장에서도 나치즘으로부터 현 독일에 직접적으로 계승되는 유산이 거의 없기에 나치 독일을 철저히 부정하고 [[흑역사]]로 규정하여 유럽의 역사적인 문제로 인한 균열을 차단하고 단결을 도모하여 세력권을 공고히 하며 유럽의 중심 지위를 살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게다가 독일은 상임이사국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킨 경험이 있는 독일은 필사적으로 전쟁을 다시 일으킬 의사가 없다는 것을 어필해야 하는 처지이다.][* 참고로 이 관점에서 보면 일본과 독일의 역사에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가 설명된다. 우선 일본의 정계 자체도 2차 대전 때와의 연속성이 독일보다 훨씬 강하게 나타나기에 완전히 부정하기에 여의치 않다. 게다가 일본은 근본적으로 섬나라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어서 어차피 지역 패권을 틀어쥐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굳이 독일처럼 주변국들의 눈치를 볼 입장이 아니다.] 물론, 이 정도의 계산을 이웃 국가들도 모를 리는 없으나 이유가 뭐가 되었든 간에 과거사를 반성하고 배상하는 것이 그들로서도 나쁘지 않을 일이니 주변국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이게 어느 정도 성공했기에, 독일 통일 이후 독일 재무장에 관해 주변국들 역시 환영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유럽을 이끌어가는 데 주요 파트너인 프랑스의 여론조사에서 독일을 가장 호감가는 나라로 뽑아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만 여전히 독일 내에도 극우적인 언동이 종종 있다. '[[벨기에 독일어 공동체|마스 강]]에서 [[동프로이센|메멜 강]]까지 [[쥐트티롤|에치 강]]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벨트 해]]까지'라는 가사가 실린 국가 1절은 공식 행사에서는 안 불렀으나 월드컵 경기 중 관중들이 떼창을 해서 문제가 생긴 적이 있다. 때때로 다시 [[네오 나치]]가 창궐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다니는데, 경찰이 검거에 실패했다거나 하는 뉴스는 잊을 만하면 올라온다. 또한 국방군과 같이 현 독일로 계승되는 경우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진 않는다. 전 국방군의 장례식 같은 행사가 거창하게 행해지기도 하고 나치 시절의 전투 등 일부 업적은 형식적으로나마 기념한다. 만약 국방군의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다면 전 독일 [[6호 전차 티거|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가 '''[[티거]]'''라는 이름의 약국을 운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차 에이스 [[미하엘 비트만]]은 [[SS]] 소속이어서 전과가 삭제되었다.] 물론 [[독일 국방군]]도 홀로코스트에 관련되었지만 이들은 [[무장친위대]]와 달리, 나치즘이라는 사상 아래 강제로 전쟁에 동원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평가를 받는다. 물론 [[해군선옥론]] 문서의 '독일의 깨끗한 국방군 신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들도 전쟁범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비교적 근래까지 독일에서 [[국방군 무오설|독일 정규군은 무죄라는 인식]]은 널리 퍼져 있었으나 1983년을 기점으로 현재는 나아져가는 추세로 대부분 정상적인 독일인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국방군도 전쟁범죄에 관여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독일에서 국방군 장교의 군모만 장난으로 써도 독일인들의 시선이 거의 경악에 가깝다. 특히 통독이후 인사개편과 역사 재인식과정을 거치면서 국방군 신화를 거의 부인하고 있고 통독 이후 사과에선 '독일인들에 의한' 이라는 문구를 넣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독일의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다시 한번 국방군 신화가 고개를 들고 있다. 2차 대전 참전 용사인 독일 노인들을 보면 자신들은 볼셰비즘 러시아와 맞서 유럽을 지킨 것이라며 강변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1PJkNZ30WV0|#]] 보상 문제에 대해선 제일 말이 많은데 일괄적으로 [[파리 조약]]을 통해 서독 정부의 전쟁배상처리를 항복 당시 조건에서 완화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독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약소국에는 일체 아예 배상 처리를 안하고 있고 현재 독일정부도 공식적으로 배상금 지급요 구 자체엔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과 유럽 연합 창설 이후 독일 정부는 독일에 부채를 지닌 그리스나 해당 국가들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전쟁 종결일에 특별 부채 탕감이라는 태도로 비공식적 배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해 유럽 약소국들은 비공식적인 것인 만큼 전쟁반성의미로 부채 탕감이라 해도 공식적 배상금을 그딴 거 안해도 따로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바로 이것이 과거사 청산에서 독일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